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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왕 [뉴스 속의 한국사] 견훤과 후백제 -

by kxpgar 2022. 1. 12.

 

"한국 역사상 후삼국시대(901~936년)는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 3국이 정립했던 시기입니다" 926년까지는 북쪽에 발해가 존재했기 때문에 4개의 나라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 중 서기 900년부터 936년까지 36년간 후백제의 수도였던 전라북도 전주에서 당시의 유적을 찾는 정밀조사가 연말까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867~936)은 어떠하였을까요?

아기 때 호랑이가 젖을 먹였답니다."신라의 김유신이 흙먼지를 날려 황산을 거쳐 사비(현재의 충남 부여)에 이르러 당나라 병사들과 힘을 합쳐 백제를 토벌해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감히 완산(전주)에 도읍하여 의자왕의 묵은 울분을 씻으려 한다."

견훤은 후백제를 세울 때 사람들을 불러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660년에 멸망한 백제를 240년 만에 되살린다는 말로 옛 백제였던 지역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견훤이 과연 백제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견훤의 아버지는 원래 신라 땅이었던 경상북도 문경의 호족(재산이 많고 세력이 강한 가계)이었다고 알려진 아자개였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들판에서 일하는 아자개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려고 포대에 싸인 견훤을 나무 밑에 두었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견훤에게 젖을 먹였다는 설화도 전해집니다.

이 설화는 견훤이 어려서부터 보통 인물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처음에는 부유하지 못한 농민 출신이었던 것으로 밝혀집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견훤은 어려서부터 체격과 용모가 웅장하고 생각이 활발했다고 합니다. 서기 9세기 신라는 왕위를 둘러싼 귀족들의 다툼과 사치·부패로 중앙정부의 힘이 약해지고 지방 곳곳에서 새로운 세력이 발생하여 혼란을 겪을 때였습니다. 세금을 거부하는 민란이 일어나 농민들이 힘을 길러 장군이 되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각지의 호족들은 농민들을 끌어들여 무장세력이 되었고, 신라의 관등제도에 의해 출세가 제한되었던 6두품이 이에 가담했습니다.

신라왕을 포석정에서 죽였습니다.견훤은 신라 군대의 장교가 되어 서남쪽 해안에서 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세력을 키워 900년(효공왕 4년)에는 후백제를 건국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901년에는 대야성(경남 합천)을 공격하여 본격적으로 신라를 공격하였습니다. 같은 해 신라 왕족 출신의 궁예가 후고구려를, 918년에는 왕건의 궁예를 몰아내고 그 뒤를 이은 고려가 그 뒤를 잇게 됩니다. 이후 견훤은 왕건과 후삼국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을 계속하게 됩니다.

견훤이 가장 성공을 거둔 해는 927년이었다. 신라의 도성인 금성(경상북도 경주)을 공격하여 포석정(연회장소)에서 신라 55대 왕인 경애왕을 사로잡아 죽이고 경순왕을 왕으로 앉혔습니다.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왕입니다. 견훤은 이후 공산(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의 군대와도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왕건은 이때 전사위기를 간신히 넘겼다고 합니다. 이 시대에 이르면 후백제가 후삼국을 통일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들의 배신으로 고려의 항복 929년 고창 전투에서 왕건에게 대패하였는데, 견훤의 결정적 몰락은 왕위 계승 싸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넷째 아들 금강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는데, 장남 신검이 935년 정변을 일으켜 견훤을 금산사라는 절에 가두어 왕이 되었습니다. 견훤은 사찰을 빠져나가 고려에 항복하였고, 이듬해인 936년 왕건의 군사가 신검과 싸우면서 후백제는 멸망하였습니다. 후백제는 36년 만에 소실되고 말았답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견훤이 지나치게 무력을 믿어 개혁 의지가 약했던 것이 실패의 큰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대전대학교 김갑동 교수는 신라군 장교 출신으로 보수적이었던 견훤이 새로운 정치, 사회체제를 수립하지 못하고 힘만 있으면 모두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신라왕을 죽인 실수를 범하였기 때문에 이후 신라인들에게 역적으로 취급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견도 있습니다. 한국전통문화대학의 이도학 교수는 견훤이 신라를 멸하는 대신 기존의 질서를 존중하고 경쟁자인 왕건을 제압하는 것을 당면 과제로 삼고 중국의 후당 오월, 북방의 거란, 일본 등과 폭넓은 교류를 시도하면서 전통 속의 변화와 다양성을 추구했다고 말했습니다. 36년간의 짧은 후백제의 역사도 우리 역사 전체로 볼 때 귀중한 문화자산이었다는 주장입니다.

☞ 후백제 2대 신검 견훤의 장남인 신검은 서기 935년부터 936년까지 왕위에 오른 후백제의 둘째이자 마지막 왕입니다. 부왕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에 오르려 하자 이찬 벼슬의 신하 능환과 두 동생 양검 용검의 권유를 받아들여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어 동생 금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936년 고려 태조 왕건과 일선군(경북 구미) 간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왕위에 오른 지 1년 반 만에 후백제는 멸망하게 됩니다. 능환과 두 동생은 처형된 반면 신검은 고려에서 벼슬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신검의 사망기록이 뒤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신검도 이때 동생과 함께 살해되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견훤이 왕건과의 경쟁에서 불리해지자 타협하는 태도를 취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강경파 신검들이 정변을 일으켰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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